경제학 용어에 '효용체감(效用替減)의 법칙'이란 것이 있습니다. 빵과 사과를 생산하는 사람이 있다면, 빵만 먹던 사람은 빵의 효용가치가 점차 떨어져 사과를 찾게 되고, 또 사과의 효용가치가 떨어지면 빵을 찾게 되어 둘이 균형을 이루게 된다는 이론이죠.
1970년대 비디오시장이 활성화되면서 크게 두가지 방식의 비디오가 나왔습니다. 소니에서 개발한 베타맥스와 JVH사의 VHS입니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베타 방식이 앞섰지만(화질이 좋고 잡음이 적었음) 소니가 라이센스 생산을 고집한 데 비해 VHS쪽이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점유율 면에서 앞서나가기 시작했습니다(일각에서는 미국 포르노영화가 VHS방식으로만 출시되었기에 VHS방식이 더 빨리 퍼졌다는 의견도 있더군요),
어쨋든 VHS방식이 앞서나가기 시작하자, VTR 구매자들은 보다 많은
포르노영화를 볼 수 있는 VHS방식 VTR을 선호했습니다. 비디오 제작자들 역시 더 많은 소비자들이 가지고 있는 VTR에 맞추어 VHS방식 비디오를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가 유럽과 미국에서는 더이상 베타방식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참고).
이러한 과정은 컴퓨터업계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애플의 맥킨토시가 라이센스 생산만을 고집한 반면 IBM은 라이센스에 엄격하지 않았기에 수많은 조립PC가 IBM의 점유율을 높여주었고, 점유율이 높은 IBM소프트웨어의 양산, 많은 소프트웨어가 존재하는 IBM PC의 구입이 반복되어 맥킨토시의 점유율은 계속 떨어졌습니다. 지금은 맥킨토시는 전자출판 분야에서만 남아있죠(물론 맥킨토시의 폐쇄적 정책이 맥킨토시의 고급 이미지를 유지시켜 많은 매니아를 만든 면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효용체가(效用替加) 또는
자기조직화(self organization)라 합니다. 어떤 작용의 결과가 다시 그 작용의 원인이 되어 그 작용이 더욱 강력해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러한 자기조직화의 보기는 많습니다.
- 쿼티(QWERTY) 자판에 이어 드보락(DVORAK) 키보드가 개발되었습니다. 듣기로 드보락(DVORAK) 자판은 쿼티(QWERTY)자판보다 배우기도 쉽고 타자도 빠르다고 합니다(이것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긴 합니다만).
하지만 QWERTY자판 타자기는 이미 많은 기업에 보급되어 많은 타자수들이 사용하고 있었죠. 새로 타자를 배우려는 사람들은 보다 많은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는 쿼티(QWERTY) 자판을 배우는 편이 취직에 훨씬 도움이 됩니다. 기업들 역시 쿼티(QWERTY) 타자기를 구비하는 쪽이 타자수를 찾기 쉽습니다. 그 때문에 드보락(DVORAK) 타자기를 구비하려는 기업도, 배우려는 사람도 없어져 결국에는 사장되고 맙니다.
이러한 과정 역시 우리나라의 2벌식/3벌식 타자기에서도 똑같이 재현됩니다. 3벌식이 배우기 쉽고 빠르다는 평이 있었지만, 이미 많이 보급된 2벌식에 밀려 사라지게 되었죠.
- '시계방향'이란 말이 보통으로 사용될 정도로 현재 모든 시계들은 오른쪽 방향으로 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모든 시계가 오른쪽 방향으로 돌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오른쪽 그림은 피렌체의 플로렌스 대성당에 있는 시계로, 현재 시계와는 달리 24시간이 다 그려져 있었으며 왼쪽 방향으로 돌고 있는 시계입니다.
이것 역시 어느 순간 '12시간 오른쪽 방향' 시계가 보편화되면서 효용체가의 법칙이 적용된 보기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모두 사람들에 의한(사람들의 지성에 의한) 자기조직화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지성에 반하는' 자기조직화는 없을까요?
- 버스회사에서 일정간격으로 버스가 출발합니다.
가라는 버스가 어느 정거장에 도착했는데, 단체승객이 있는지 사람들이 약간 많군요.
가는 그들을 모두 태우느라 약간 늦게 출발하게 됩니다.
자, 이제
가와 앞차와는 약간 멀어졌고,
가와 뒷차
나와는 약간 가까와졌습니다. 이후의 모든 정류장에서
가는 더 오래 기다린 사람들(더 많이 모인 사람들)을 태우느라 시간을 지체해야 합니다,
나는 더 조금 기다린 사람들(더 조금 모인 사람들)을 태우느라 빨리 출발할 수 있습니다. 결국
버스들은 맨날 두세대씩 몰려다닌다는 불평이 나오게 됩니다.
지금은 이런 '자기조직화'를 막기 위해 버스마다 GPS를 달고 있습니다. 즉 '자기조직화를 막기 위해' 사람들의 지성이 동원된 보기입니다.
이러한 효용체가의 법칙은 물리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자연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자기조직화를 이해한다면, 자연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현상을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 열대지방 바다는 햇빛에 의해 뜨겁고 습한 공기가 덮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공기는 정체되어 있지 않습니다. 해류라든가 수면의 물고기, 물새, 바람 등에 의해 계속 교란이 일어납니다.
그러한 교란에 의해 대기 상층부에서 약간의 상승기류가 일어납니다. 보통 때라면 그 작은 상승기류는 금방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습한' 공기들입니다. 상승기류 윗부분의 습한 공기는 응결되어 구름이 되죠. 그와함께 수증기의 '잠열(潛熱 latent heat)이 발생합니다.
이 잠열은 주위 공기를 데우고 데워진 공기는 상승기류를 발생시킵니다. 이 상승기류는 더 많은 수증기의 잠열을 만들고 이 잠열은 상승기류를 강화시키며 더 많은 수증기를 응결시켜 더 많은 잠열을 만들고... 하는 과정이 되풀이되며 마침내 이런 것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즉 바다위 대기가
에너지를 얻을 수 없는 평형상태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대는 비평형상태로의 전환 -
엔트로피의 감소가 자연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물론 지구가 태양이라는
외부의 에너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계이기 때문에 이러한
엔트로피의 감소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지구의 자전 등 여러가지 요소가 더 들어가게 되지만, 그 원동력은 이와같이 상승기류와 수증기의 잠열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자기조직화'입니다.
- 최초 태양계는 태양을 중심으로 한 먼지구름 덩어리였습니다.
최초 아주 작은 먼지들이 충돌해서 약간 큰 먼지들의 덩어리를 이룹니다. 이 먼지들의 덩어리는 약간 큰 인력을 가지게 되고 주위의 먼지들을 당기게 됩니다. 먼지들이 뭉칠수록 인력은 더 커지고, 인력이 커질수록 더 많은 먼지들을 끌어당기고, 그에따라 더 많은 인력을 가지게 되고, 또 더많은 먼지들을 끌어당기고... 하는 과정이 되풀이되어 마침내 이런 것이 만들어집니다.
역시 여러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태양계가 만들어지지만, 이러한 자기조직화 역시, 창조론자들이 '신의 작품'이라 여기는 태양계 탄생의 원인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자기조직화'에 의해 만들어진 행성들은 그 행성을 구성하는 수많은 먼지들의 평균궤도인 원형에 가까운 궤도를 돌게 됩니다.
- 생태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niche(생태학적 지위)를 차지하는 생물들은 필연적으로 경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생물들 사이의 경쟁과 자기조직화는 앞에서 한번 다뤄본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나타났던 것처럼 아주 조금이라도 우세한 종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새끼를 낳고 조금이라도 우세를 더 점하는 과정이 반복되기에 하나의 종으로 '자기조직화'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창조론자들이 종종 하는 질문 - 왜 자연계에는 D형이 아닌 L형 단백질만이 존재하는가 - 에 대한 답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로 본다면 최초의 바다에서 처음 나타난 '자기복제분자'가 생명의 시초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일반적인 화학반응에 의해서는
L형 분자와
D형 분자가 같이 만들어집니다. 물론 이들이 결합되어
L형 자기복제분자와
D형 자기복제분자도 만들어질 것입니다.
여기서 최초에
아주 약간 많이 생겼던
L형 자기복제분자로 '자기조직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위의 8-Queen's Problem에서 불과 0.01% 많이 있었던 종이 결국 전체를 다 차지했던 것처럼 말이죠.
이렇게 과학자들은 진화론을 증명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이론들을 공부하고 실험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진화론은 점점 더 튼튼한 이론이 되고 있습니다.
덧
어느 창조론자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그 답은 이렇더군요.
할 말이 없으니 이제는 카오스 이론으로 도망가십니까?
진화론을 증명하기 위해 카오스 이론을 도입하는 것을 카오스 이론으로 도망가는 것으로 보는 한 창조론은 사이비과학일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