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벌레들이 같이 살고 있는 조그만 숲이 있습니다. 여기서 벌레는 나무를 갉아먹습니다.
이 숲의 나무들은 벌레의 공격에 의해 두꺼운 껍질을 가진 나무가 진화적 우위를 갖습니다*.
마찬가지로 벌레들 역시 나무껍질에 의해 크고 단단한 턱을 가진 벌레가 진화적 우위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숲의 나무들은 점점 두꺼운 껍질을, 그 숲의 벌레들은 점점 더 크고 단단한 턱을 갖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레가 나무를 먹는 상황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작은 턱으로 얇은 나무껍질을 뚫고 나무를 파먹었다면 지금은 큰 턱으로 두꺼운 나무껍질을 뚫고 나무를 파먹는다는 차이일 뿐입니다.
*위에서 '진화적 우위를 갖는다'는 말은, 두꺼운 껍질을 가진 나무/크고 단단한 턱을 가진 벌레들이 생존경쟁에 유리하게 되어 더 많은 번식기회를 갖고, 그로인해 두꺼운 껍질을 가진 나무/크고 단단한 턱을 가진 벌레들이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밑에 공진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공진화에 의해 천적관계의 진화가 계속되는 현상을 진화적 군비 경쟁이라고 합니다. 사실 두꺼운 나무껍질이나 크고 단단한 턱은 그들이 번식하는데는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나무껍질이나 턱을 만들기 위해 자원을 쓰느라 번식에 들어가는 자원이 줄어들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한쪽이 진화를 멈춘다면 그들은 전멸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냉전시대 미소의 군비경쟁처럼 말입니다.
혹시 나무와 벌레들이 협정을 맺을 수도 있겠죠.
"우리가 아무리 두꺼운 껍질과 큰 턱을 만들어봐야 벌레가 나무를 파먹는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그럴 바에는 우리가 최소한의 껍질과 턱을 만들고 나머지는 번식에 힘쏟자"
그렇게 되면 그들은 두꺼운 나무껍질과 큰 턱을 만들 자원을 번식에 쏟을 테니 더 많은 나무들과 벌레들이 사는 지상낙원이 될 것입니다.
가끔씩 나오는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그리는 세상이 저런 세상일 것입니다. 너도 나도 총을 놓는다면 전쟁으로 죽을 사람이 없으니 인구도 늘어나겠죠. 탱크대신 자동차를, 화약대신 비료를 만들테니 생산성도 늘어나는 낙원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저런 세상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극히 일부의 벌레들이 다른 벌레들보다 약간 큰 턱을 가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더 많은 나무를 갉아먹으며 진화적 우위를 차지할 것입니다. 결국 모든 벌레들이 조금 더 큰 턱을 가지게 되며 나무들은 생존을 위해 더 두꺼운 껍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극히 일부의 나무들이 조금 더 두꺼운 껍질을 가져도 마찬가지가 될 겁니다.
그렇게 해서 저 지상낙원은 다시 진화적 군비경쟁이 판치는 예전의 숲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역시 아래에 있는 죄수의 딜레마상황처럼 배신자가 더 큰 이익을 가지게 됩니다. 병역거부자들의 낙원 역시 마찬가지죠. 아무도 무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약간의 무장만으로도 커다란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을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들 걸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결국 모든 사람들이 다시 무장을 하는 군비경쟁의 상황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군비경쟁의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쟁없는 낙원을 만들 가능성은 없을까요?
첫째로 죄수의 딜레마에서 가장 우수한 전략, 받은대로 돌려주는 Tit-for-Tat 전략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받은만큼 돌려주기 위해서는 나도 무장을 하고 있어야겠군요. 실제로 냉전중에 긴장이 높아도 전면전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무장을 한다면 '병역거부자의 낙원'이 아니게 되겠죠.
둘째로 더 두꺼운 나무껍질, 더 큰 턱을 만들었을 때 얻을 수 있는 진화적 우위를 박탈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만약 두꺼운 나무껍질이나 큰 턱을 만드는 비용이 너무 커서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더 작다면(즉 죄수의 딜레마에서 배신했을때의 보상을 낮추면) 다른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낙원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무장을 안한 상태에서 약간의 무장을 한 사람들에게 손해를 줄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 문제겠네요.
이래저래 병역거부자들이 원하는 낙원은 불가능한가 봅니다.
그런데, 병역거부자들의 낙원은 불가능하다 치고 위에서 예로 든 나무와 벌레들의 낙원은 정말로 불가능할까요?
만약 모든 벌레들이 지나치게 큰 턱을 가진 벌레와는 짝짓기를 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내 자손이 큰 턱을 가지고 쉽게 번식할 수 있겠다는 이익을 포기하고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나무들이 지나치게 두꺼운 껍질을 가진 나무와는 꽃가루를 교환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마찬가지로 내 자손들이 두꺼운 껍질을 가지고 오래 살 수 있겠다는 이익을 포기하구요)?
만약 그렇게 한다면 큰 턱과 두꺼운 껍질을 가진 '배신자'들은, 자신은 이익일 수 있으나 자손을 만들지 못하기에 도태되어버리고 지상낙원이 유지될 수 있겠군요.
물론 이 경우에는 '내 이익을 포기하고서라도 이 지상낙원을 유지하자'는 공감대가 모든 벌레들, 그리고 모든 나무들에게 퍼져있어야겠지만 말입니다.
현실에서도 '민주주의를 유지하자'는 공감대가 전 국민들에게 퍼져 있고 전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이익을 약간 포기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투표를 하기 위해 몇시간 늦게 애인과 만난다거나 몇시간동안만 온라인게임에서의 레벨업을 멈춘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상은 꿈이고, 자신감이고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희망입니다.
회의는 깨어 있는 것이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절대 이 말을 잊으면 안됩니다.
from : SBS Drama Kaist(마지막 강의)
진화론 이야기 - 공진화
옛날 어느 프로그램에서 '100미터 혼자달리기'같은 게임을 한 적이 있습니다. 뭐 학생들이 나오는 것이니 결국에는 대충 비슷한 기록에서 정체하더군요. 그런데 어느 학교에선가 새로운 방식을 들고 나왔습니다. '바람돌이'라고 해서 다른 친구 하나가 옆에서(트랙 밖에서) 같이 달리는 것이었죠. 그 결과 기록은 극적으로 단축되었습니다. 혼자 달리는 것보다 경쟁하는 것이 더 빠르다는 것이죠.
진화론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관찰됩니다. '공진화'라는 현상이죠. 천적관계 또는 공생관계인 두 종이 같이 진화해나가면서 서로가 상대방에 대한 선택압으로 작용하여 (창조론자들은 절대로 우연히 생길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연의 신비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나뭇잎 틈에서 사는 벌레(a)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벌레를 먹고 사는 새(A)가 있습니다. 이 새의 원시적인 눈은 사물의 명암만 알 수 있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 벌레의 모습은 그야말로 나뭇잎 위에서 눈에 확 띄는 모습이죠.
벌레들 중 일부가 나뭇잎과 비슷한 색깔로 변이를 일으킵니다(b), (b)는 원시적인 (A)의 눈에 나뭇잎과 구분이 안되므로 (A)의 눈을 피해 살아남아 더 많은 자손을 남깁니다. 큰 차이가 아니라도, 설사 저녁과 새벽의 어스름, 짙은 안개 속에서만 속여넘길수 있는 변화라도 충분합니다.
이런 식으로 원시적인 눈을 가진 (A)가 나뭇잎과 착각하는 (b)가 많아지면 이것은 '약간' 좋은 눈을 가지고 나뭇잎과 (b)를 구분할 수 있는 새(B)에 대한 선택압으로 작용합니다. (B)는 (A)에 비해 더 많은 벌레를 잡아먹고 더 많은 새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죠.
(b)는 다시 (B)의 눈을 속일 수 있을 만큼 나뭇잎과 더 닮은 변이를 일으킨 (c)와의 경쟁에서 뒤떨어지고, (B)는 다시 (c)를 인식할 수 있는 (C)에 의해 도태되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어 결국 다음과 같은 벌레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즉 이런 벌레들이 딱정벌레나 호랑나비에서 '나뭇잎을 흉내내서 나뭇잎 속에 숨어야지 숨어야지' 하다가 어느 순간 '짠~~'하고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형편없던 포식자의 눈과의 오랜 시간에 걸친 공진화의 결과입니다.
진화론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관찰됩니다. '공진화'라는 현상이죠. 천적관계 또는 공생관계인 두 종이 같이 진화해나가면서 서로가 상대방에 대한 선택압으로 작용하여 (창조론자들은 절대로 우연히 생길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연의 신비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나뭇잎 틈에서 사는 벌레(a)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벌레를 먹고 사는 새(A)가 있습니다. 이 새의 원시적인 눈은 사물의 명암만 알 수 있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 벌레의 모습은 그야말로 나뭇잎 위에서 눈에 확 띄는 모습이죠.
벌레들 중 일부가 나뭇잎과 비슷한 색깔로 변이를 일으킵니다(b), (b)는 원시적인 (A)의 눈에 나뭇잎과 구분이 안되므로 (A)의 눈을 피해 살아남아 더 많은 자손을 남깁니다. 큰 차이가 아니라도, 설사 저녁과 새벽의 어스름, 짙은 안개 속에서만 속여넘길수 있는 변화라도 충분합니다.
이런 식으로 원시적인 눈을 가진 (A)가 나뭇잎과 착각하는 (b)가 많아지면 이것은 '약간' 좋은 눈을 가지고 나뭇잎과 (b)를 구분할 수 있는 새(B)에 대한 선택압으로 작용합니다. (B)는 (A)에 비해 더 많은 벌레를 잡아먹고 더 많은 새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죠.
(b)는 다시 (B)의 눈을 속일 수 있을 만큼 나뭇잎과 더 닮은 변이를 일으킨 (c)와의 경쟁에서 뒤떨어지고, (B)는 다시 (c)를 인식할 수 있는 (C)에 의해 도태되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어 결국 다음과 같은 벌레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즉 이런 벌레들이 딱정벌레나 호랑나비에서 '나뭇잎을 흉내내서 나뭇잎 속에 숨어야지 숨어야지' 하다가 어느 순간 '짠~~'하고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형편없던 포식자의 눈과의 오랜 시간에 걸친 공진화의 결과입니다.
참조 : 눈먼 시계공(리처드 도킨스) , 인공생명(스티븐 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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