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론 이야기 - 비유법과 궤변


여기 전등과 탁구공이 있습니다. 전등과 눈, 탁구공 순서로 배열되면 탁구공의 밝은 부분이 완전한 동그라미로 보입니다. 이때가 바로 보름달입니다. 그리고 전등과 탁구공, 눈의 순서로 배열되면 탁구공의 밝은 부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때가 그믐달입니다. 만약 눈을 중심으로 전등과 탁구공이 90도 각도를 이루면 탁구공의 밝은 부분은 정확히 반원을 만듧니다. 이때가 바로 반달입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는 말처럼 아둔한 말은 없습니다. 산속에 사는 개미들 중에 인간을 본 개미가 있는데, 다른 개미들은 그 개미에게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인간을 보았던 몇몇 개미 중에 한 개미가 인간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가장 진보된 설명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맷돼지를 본 개미는 맞지? 그런데 그 맷돼지가 앞다리를 다 들고 뒷다리만으로 걷는다고 생각해봐. 그게 바로 인간이야.' '아하. 그렇구나! 혹시 내가 전에 본 곰이 화났을 때 모습인가?' '그래. 그래. 곰이 화났을 때의 모습이 인간과 가장 유사해!' / 우리 사람들은 위와 같은 방식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낯선 'ㄱ'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에게 낯익은 'ㄴ'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경우에 이런 비유법(比喩法 rhetoric metaphors)으로 설명하면 비교적 쉽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가'의 경우는 달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전등을 태양으로, 탁구공을 달로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나'의 경우도 '신의 존재'를 '인간의 존재'에 비유해서 비교적 이해가 쉽도록 설명하는 것이죠.

하지만 비유법은 잘못 사용하면 '궤변(詭辯 sophistry)'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비유해서는 안될 것을 비유로 설명하면 궤변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비유를 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족해야 합니다.

1. 비유할 대상과 비유될 대상에 공통점이 있어야 한다.
2. 비유로 설명할 것이 바로 그 공통점이어야 한다.

'가'를 보죠. 태양과 전등의 공통점은 '빛을 낸다'입니다. 탁구공과 달의 공통점은 '둥글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태양의 빛과 둥근 달이 만드는 달의 모양 변화를 설명하려 합니다.

즉, '가'의 경우는 제대로된 비유를 사용한 설명입니다.




'나'는 어떨까요? 여기서 설명하려는 것은 '신의 존재증명'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인간의 존재'에 비유를 했죠.

하지만 여기서 커다란 오류가 발생합니다. '인간의 존재 증거'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신의 존재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수없이 많은 것과 전혀 없는 것을 비유하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궤변이 되고 만 것입니다.




고의적인지 아니면 실수인지는 모르지만 신에 관련된 것에는 이런 잘못된 비유에 의한 궤변들이 종종 눈에 띄이곤 합니다. 이를테면 돌아온 탕아 이야기 등 말입니다.


어느 곳에 아버지와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을 열심히 일했지만 둘째 아들은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어느날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졸라 유산을 미리 받아서는 장사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큰 도시에 도착한 둘째아들은 그만 흥청망청 돈을 탕진하고 말았죠.
거지가 된 둘째아들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 아버지는 돌아온 둘째 아들을 반갑게 맞으며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주로 비종교인들에게 하며, 지금이라도 아버지 - 신에게로 되돌아오면 야훼는 반갑게 맞아줄 것이라 말하죠.

하지만 이 비유에도 중대한 오류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아버지는 평범한 사람인 반면, 이 아버지가 비유하는 신은 '전지 전능'한 존재라는 점이죠. 평범한 아버지의 경우는 아들이 돌아올지 안돌아올지 몰랐기 때문에 돌아온 아들이 반가웠던 것입니다. 반면 '전지 전능'한 신이라면 그 아들이 나가리라는 것도,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도 미리 다 알고 있었겠죠. 그 때문에 신의 입장에서는 집 앞에 나갔다 들어온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