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생존의 오해

어느 곳에 여러마리의 토끼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란 토끼는 토끼의 왕입니다. ㉠이 나타나면 다른 토끼들은 숨기에 바쁩니다.
㉡이란 토끼는 숲으로 도망가면 얼룩무늬 때문에 ㉠의 눈에서 피할 수 있습니다.
㉢이란 토끼는 재빨리 바위 밑으로 들어가 숨습니다.
㉣이란 토끼는 빠른 속도로 달아납니다.
㉠은 유유히 먹이를 먹고 암컷들을 차지합니다.

일반인들이 아는 진화론에는 수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적자생존(適者生存 Survival of the fittest) 역시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적자생존이라고 하면 '적합한 놈들만 생존한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죠. 특히 영어 'Survival of the fittest'은 직역하면 '가장 적합한 놈의 생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의 보기에서는 누가 적자(適者 fittest)일까요? 가장 강한 ㉠일까요?


그곳에 늑대 한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이 재빨리 숲으로 들어가자 얼룩무늬 때문에 늑대는 ㉡을 놓쳤습니다.
㉢이 바위 틈으로 파고들어가자 늑대는 ㉢을 포기합니다.
㉣을 쫓아갔지만 ㉣은 이미 저 멀리 도망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늑대는 남아있는 ㉠을 잡아먹을 수 있었습니다.

첫째, 누가 적자(適者 fittest)인지 쉽게 알 수가 없습니다. 위에서 보면 가장 힘센 토끼 ㉠이 적자로 보였으나 늑대가 나타났을 때는 가장 먼저 잡아먹혔죠. 결국 적자가 누구인지는 환경에 따라 달라집니다.


㉠을 잡아먹은 늑대는 만족하고 다른 곳으로 사라졌습니다.
숲에 숨어있던 ㉡도, 바위 밑에 있던 ㉢도, 멀리 달아났던 ㉣도 되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이 남긴 먹이를 먹으며 다른 암컷들과 살 수 있었습니다.

둘째, 적자생존은 '적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위 보기에서도 ㉡, ㉢, ㉣ 중 누가 최적자(fittest)인지 알 수는 없지만 셋 다 살아남았죠. 그리고 저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진화를 계속해 새로운 종들로 분화해갈 수 있습니다.
fittest만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fitter면 살아남을 수 있는, 정확히 말하자면 적자생존보다는 부적자도태(不適者淘汰 die out of unfittest)가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때문에 흔히들 적자생존만을 아는 사람들이 '적자생존이라면 가장 강한 한녀석만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을 오해를 하곤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인간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인간처럼 눈이 있어야 적자고 인간처럼 머리가 좋아야 적자입니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꿈처럼 날개가 있어 날아다녀야 적자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과연 인간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적자일까요?

땅속에 묻히게 되면 인간이 오래 살까요, 지렁이가 오래 살까요?
바다에 빠지게 되면 인간이 오래 살까요, 해파리가 오래 살까요?
동굴에 갇히게 되면 인간이 오래 살까요, 노래기가 오래 살까요?
땅속에서는 인간이 아니라 지렁이가, 바다에서는 해파리가, 동굴에서는 노래기가 오히려 적자입니다. 그들은 저런 환경(땅속, 바다, 동굴)에서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 수 있으며 무엇보다 그곳에서 번식을 할 수 있거든요. 그때문에 얼마 안가 인간이 죽은 후에도 지렁이의, 해파리의, 노래기의 후손이 그곳에 남아있을 겁니다.

가장 강하다고 적자가 아닙니다. 가장 오래 살아남는다고 적자인 것도 아닙니다. 적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후손을 얼마나 많이 낳아서 길러내느냐'입니다. 사자처럼 두세마리 낳아서 잘 키우든 개복치처럼 수억개의 알을 낳아서 그중에 몇마리만이라도 기대하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