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을 위한 중립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와 ㉯ 두 사람의 용의자가 잡혔습니다.
사건을 맡은 판사는 중립을 지키며 증인들의 증언을 듣습니다.
- 증인 ㉠ : 사건 전날 ㉮에게 칼을 팔았습니다.
- 증인 ㉡ : 사건당일 부산에서 ㉯를 봤습니다.
- 증인 ㉢ : 사건 전전날 피살자와 ㉮가 엄청 심하게 싸우더라구요.
- 증인 ㉣ : ㉮에게 돈을 빌려주고 못받았는데 사건 다음날 다 받았어요.
이런 증언을 듣던 판사는 점점 ㉮ 쪽으로 의심이 늘어갑니다. 하지만 판사는 중립을 지켜야 합니다. 판사는 증인들을 심문합니다.
- 증인 ㉠, ㉮에게 팔았던 칼이 사건에 쓰인 칼인 것이 확실합니까? 일련번호라도 있어요?
- 증인 ㉡, 증인은 그날 왜 부산에 갔습니까? 부산에 갔다는 증거 있습니까?
- 증인 ㉢, 피살자와 ㉮가 왜 싸웠는지 아십니까? 모른다면 증인의 증언은 기각합니다.
- 증인 ㉣, 증인은 그 돈이 피해자의 돈이라고 확신하십니까? 일련번호 적어 놨습니까?
그리고 ㉮가 범인이라는 수많은 증거들이 있지만, 판사는 그 증거들에 대한 재검토를 명령합니다. 그리고 ㉯가 범인이라는 증거를 찾는데 힘을 쏟습니다. 그래야 ㉮와 ㉯ 사이에서 중립을 지킬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사건은 해결되지 않지만 판사는 중립을 지키고 있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논쟁을 보면 양시론 또는 양비론을 펼치며 끼어드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소위 중 2병 증상(말싸움이나 하는 하찮은 인간들보단 내가 위대하다)을 자랑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저 높은 데서 '하찮은 인간들'의 싸움을 내려다보는 신의 기분을 느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가끔씩은 정말로 어느정도 지식도 있어보이고, 논리도 있어보이는데도 양시론/양비론을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은 중립을 지킬뿐 창조론자가 아니라고 강변을 하곤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저 위의 판사처럼 오로지 '중립을 지키기 위해 중립을 지키려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진화론/창조론 논쟁을 처음 접했습니다. 끼어들기 전에 먼저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해 중립적인 위치에서 알아볼 생각을 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해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진화론의 증거들은 쏟아져나오는데 비해 창조론의 증거는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위의 판사와 같은 실수를 하게 되는 것이죠. 진화론쪽으로 기우는 마음을 잡고 중립을 지키기 위해, 진화론에 대해 보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댑니다. 진화론쪽 증거들을 축소해서 창조론의 증거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실 아무것도 없는 '창조론의 증거'와 균형을 맞추려면 모든 진화론의 증거들을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양시론/양비론자들이 창조론자로 보이는 이유죠.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와 함께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단지 '양쪽에서 같은 거리를 유지하는' 기계적인 중립을 중립으로 착각하는 일이 생기곤 합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에서 같은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진짜 '중립'인지 아니면 '그른 것을 편들어주는것'인지 말입니다.

댓글 3개:

  1. '중세 1000년간의 유럽을 '암흑시대'라고 표현합니다. 1000년간 변화가 전혀 없었다는 뜻이죠. 중세 유럽의 수도사가 무슨 일을 했든지간에 종교 자체는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맞습니다.'


    진화론은 열심히 공부해놓고 역사 공부는 소홀히 한 모양입니다.
    서양사학계에서는 이미 중세가 암흑시대라는 헛소리는 폐기처분된지 오래인데...과학 공부했다는 사람이 역사에 대해서는 '늘 깨어있는 회의주의자'의 태도를 전혀 유지하지 못하는군요.

    주인장이 창조론자들을 비웃는 것처럼, 저도 주인장을 한번 비웃고 갑니다. 무식하면 비웃음 당해도 싸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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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래요? 누가 '암흑시대'라는 것을 폐기처분했나요?
      그에 대해 제가 썼던 글이 있는데...
      http://chamsol4.blogspot.kr/2009/09/blog-post_29.html
      로마시대에는 보통으로 만들 수 있던 다리가 중세에는 악마만이 만들 수 있는 다리가 되었습니다.

      물론 중세시대가 무조건 침체기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중세 '암흑'시대에도 나름대로 발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기간 동안 다른 지역의 발전은 눈부실 정도였죠. 그리스에서 발달했던 과학은 이슬람의 과학에 추월당해 버렸고, 중국에서 화약과 나침반을 발명할 동안 유럽에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실상이 이런데 '암흑시대'가 아니라구요.

      저를 비웃는 것은 좋습니다. 다만 답변자님이 저를 비웃을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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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중세 1000년간 서유럽의 발전속도는 그 이전 로마의 발전속도보다 현저히 낮았습니다. 유럽전체로 본다면 동방에 로마제국이 건재했고 그 로마제국의 유산을 오스만 제국이 그대로 인수했기 때문에 인류의 전체적인 기술 자체는 꾸준히 상승곡선을 그렸을지는 몰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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