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갚음(復讐 revenge)의 진화론


1 . 어떤 곳에 놀러가면 우선 숙박부부터 확인해라. 김전일이라는 이름이 있으면 재빨리 짐 싸들고 그곳에서 탈출해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약 67%의 확률로 죽는다.

2 . 재빨리 짐을 싸서 도망쳐 나와도 약 90%의 확률로 그곳에서 나가는 유일한 통로가 끊어져 있을 것이다. 아마 외다리가 끊어져 있거나 폭풍우로 배가 끊겼을 것이다. 암벽 등반으로 계곡을 건너거나 개헤엄을 쳐서라도 탈출하는 쪽을 권장한다. 이쪽이 살아날 확률이 약간 높다.

3 . 당신이 김전일의 절친한 친구라 해도 안심해서는 안된다. 범인은 김전일과 미유키 이외에는 봐주지 않는다.

4 . 김전일과 함께 있으면 약 75%의 확률로 협박장이니 그와 비슷한 것이 어디선가 나타나게 된다. 그것을 보고 '이것은 10년 전의...!'라고 놀라는 당신. 안됐다. 첫번째 희생자는 당신이다.

5 . 운 좋게 다른 사람이 첫번째 희생자가 되었다고 치자. 분명히 김전일도 못푸는 밀실살인이거나 불가능 살인일 것이다. 만약 당신이 김전일보다 먼저 트릭을 알아차렸다 해도 어두컴컴한 방에서 혼자 '그래, 그 트릭은...!'이라고 중얼거리지 마라. 100% 죽.는.다.

6 . 희생자가 늘어가면 높은 확률로 당신이 범인으로 몰리게 된다. 안심해라.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갈 일은 절대로 없다. 누명은 김전일이 100% 풀어준다. 단, 당신은 자살처럼 꾸며서 살해당할 확률이 +50가 되었다. 유감이다.

7 . 만약 당신이 범인이라면, 누군가 잘못된 추리를 하게 해서 완전범죄를 완성시키려 할 수도 있다. 이때 절대로 김전일을 그 대상으로 삼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 그는 당신보다 머리가 좋다.

8 . 단, 당신이 마지막에 자살할 것이거나 감옥에 가는것도 두려워 하지 않고 오직 복수만을 실행할 결심이라면 김전일을 불러라. 당신이 원하는 만큼 다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김전일은 트릭을 풀 뿐이지 살인은 안막는다.

9 . 운이 좋아서 다른 사람이 누명을 쓰고 사건이 끝났다고 치자. 안심하면 안된다. 김전일은 집에 가다가 뭔가를 보고 힌트를 얻어서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라고 외치고는 돌아올 것이다.

10 . 돌아온 김전일은 사람들을 다 불러 모을 것이다. 자살하려면 이때 해라. 괜히 그 자리에 나갔다가 과거 다 틀통나고 있는쪽 없는쪽 다 팔리고 결국 자살하게 된다. 아니면 김전일이 말 꺼내기 전에 자수해라.

11 . 나같으면 김전일을 제일 먼저 죽인다.


확실히 추리만화 김전일의 이야기 패턴을 잘 짚은 말입니다. 대부분의 스토리는 위와 같이 진행되죠. 범행의 동기는 (거의 항상) 과거에 대한 복수이며, 범인은 과거의 복수를 위해 완전범죄를 꾸미지만 결국 김전일에 의해 트릭이 밝혀져 체포되거나 자살하거나 합니다.

여기서 '앙갚음(復讐 revenge)'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왜 인간은 복수심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명확한 '복수의 의지'를 가진 것은, 인간을 비롯한 포유류나 조류 등 장기 기억력을 가진 일부 동물들입니다. 옛날 사냥꾼들에게는, 상처입힌 동물들은 끝까지 따라가서 잡아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들이 상처에서 회복된 후 인간에 대한 복수심으로 인간을 습격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말입니다(코끼리의 복수에 대한 연구).


하지만 의지를 갖고 있지 않는 생물들은 복수를 하지 않을까요?

쐐기벌레나 폭탄먼지벌레 같은 것들은 자신을 먹으려는 포식자의 입 안을 상처입힙니다.
포식자는 앞으로 쐐기벌레나 폭탄먼지벌레 같은 먹거리를 피하게 됩니다.


벌들은 꿀을 훔쳐가려는 동물들에게 벌침을 선사합니다.
벌에 쏘인 동물들은 맛있는 꿀을 보면서 침만 흘리게 됩니다.


독초들은 자신을 먹으려는 포식자들에게 배앓이나, 심하게는 죽음까지 선사합니다.
배앓이를 하거나 동료가 죽는 것을 본 동물들은 그 독초를 피하게 됩니다.

즉 '앙갚음'이라는 것은, '날 건드리면 너도 다친다. 그러니 다시는 우릴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복수의 진화'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화'가 늘 그렇듯 여기서 한가지 큰 문제가 생깁니다.

앙갚음에 의해 자기만족을 느끼는 개체가 있다면, 그 자기만족에 의해 더욱 '가열찬 복수'를 할 테고, 주위 다른 생물들은 그들에게 경고를 받아 건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즉 '주위에 대한 경고'에는 관심없이 '자기만족'만을 느끼는 개체라도 진화적 우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죠. 즉 '복수의 진화'가 아닌 '복수심의 진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까마귀가 쐐기벌레를 잡아먹었는데, 먹을 때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가 며칠 후에 고통이 느껴진다면 어떨까요? 먹힌 쐐기벌레의 입장에서는 '나를 먹었으니 너는 며칠 후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라 만족하며 죽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까마귀의 입장에서는 왜 고통스러운지 알 수 없을 테고 다른 쐐기벌레를 잡아먹는데 있어서 거리낌이 없을 것입니다. 그 까마귀가 며칠간 먹은 먹거리를 다 기억하고 분석해서 쐐기벌레와 고통의 상관관계를 알아채지 못한다면 말이죠.

앙갚음을 한다면, 가능하면 그 즉시, 그리고 그 대상 뿐 아니라 주위에 널리 알리는 것이 최선입니다. '저녀석을 건드리면 저꼴난다'는 것을 가능한 한 많은 대상에게 확실하게 보여주지 않으면 효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김전일 만화에 나오는 범인들은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로지 '복수했다'는 자기만족을 위해서 범행을 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정말로 복수를 하고 싶다면 완전범죄 따위가 아니라 오히려 떠들썩하게 범죄를 저질러야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한다는 복수 본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더 좋은 복수입니다.

물론 '진화'가 늘 그렇듯 이 '복수심의 진화' 역시 완벽하지 않습니다. 복수심이 극도로 진화된 두 집단이 만난다면 둘 사이의 치킨게임에 의해 둘 다 전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제대로된 복수란 자기만족을 위해 완전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끝없이 치킨게임을 벌여 양쪽 다 피폐해지는 것도 아닙니다.똑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그래서 나와 내 일족이 더이상 피해를 입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이 가장 완벽한 복수라 할 수 있습니다.

덧 : 어느 TV프로그램에서 본 내용입니다.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가해자 부모가 피해자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답니다. '용서해 주는 것이 가장 큰 복수다'란 글귀와 함께요
만약 가해자를 용서해줌으로써 그에게 부끄러움을 주어 행동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큰 복수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끄러움 자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용서가 복수가 될 수는 없겠죠. 그리고 저런 글귀를 가해자측에서 보내왔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즉 저들에게는 '용서해 주는 것이 가장 큰 복수다'가 해당 안되는 쪽입니다.